"한눈팔지 말거라."
무성의 목소리에 잠시 딴청을 부리던 진영이 황급히 자세를 추슬렀다. 머쓱해진 진영이 목각 인형과 대련을 하는 척하다가 살며시 길홍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늘따라 왠지 무성 사형의 분위기가 무겁지 않아?"
"뭔 소리여. 평소랑 똑같고만. 그나저나 배고파 죽겠다. 아침은 아직 멀었는가?
"아직 아침 훈련 중이잖아. 훈련도 안 끝났는데 무슨 벌써부터 밥 타령이야?"
"아이, 배고파 죽겠는디이."
"그러지 말고 좀 자세히 봐봐. 무성 사형이 평소랑 좀 다르지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똑같은 거 같은데... 그냥 네 기분 탓 아니냐?"
"아니야. 분명 뭔가 있어. 여자에겐 직감이란 게 있는 법이라구."
진영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화중이 과장된 몸짓으로 놀라는 척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에? 진영 사저가 여자였어요?"
"야!"
화중의 말에 진영이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화중과 진영의 모습에 길홍이 뒤로 넘어갈 듯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거기! 훈련에 집중해라!"
무성의 엄한 목소리에 세 사람이 재빨리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진영은 애꿎은 목각 인형에게 화풀이를 해대며 저 두 멍청이의 아침밥은 개나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진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무장을 둘러보는 무성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지금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저렇게 웃으며 장난치는 동문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고, 이곳에선 잠시나마 과거의 기억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가끔은 모든 걸 잊고 이대로 지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곤 했다.
하지만 무성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선 무슨 한이 있어도 홍문신공을 전수받아야 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거라면....
문득 주머니에 넣은 무성의 손에 작게 접힌 약포지가 잡혔다. 며칠 전 녹명촌에서 만난 여인에게서 받은 가루약이었다. 매끄러운 종이를 만지는 감각에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무성은 애써 생각을 털어내고는 황급히 손을 빼냈다.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는 사부님께서 홍문신공을 물려주실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수련에만 힘을 쏟으면 될 것이다.'
무성은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공기를 가르는 무성의 주먹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사부님의 탕약 재료를 사기 위해 드문 외출을 한 날이었다. 녹명촌을 찾은 무성은 심약선에게 받은 한약 여섯 첩과 약초들을 품에 넣으며 약왕원을 나서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그들이 자신을 찾아왔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한 무성이, 길을 터주기 위해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상대에게서 나온 말이 뜻밖이었다.
"힘을 가지고 싶으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바라본 무성의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 둘이 서 있었다. 그들 중 키가 더 큰 여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무성에게 말했다.
"복수를 한다더니... 한심한 꼴이로구나."
"그걸 어떻게..."
"홍석근은 너에게 비급을 주지 않을 것이다."
"....!?"
갑작스런 여인의 말에 무성의 말문이 막혔다.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길래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홍석근이 숨어있는 곳을 알려준다면, 내 너에게 원하는 것을 줄 것이다."
무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인은 무성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까마귀를 날리거라. 그럼 찾아갈 터이니."
자신의 할 말만 마친 여인이 무성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사라졌다. 그러자 이번엔 그녀를 뒤따라 온 또 다른 여인이 무성에게 다가왔다. 여인은 마치 물건에 가격을 매기듯 무성의 몸을 위아래로 훑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흐음... 제법 반반하게 생겼네?"
말을 마친 여인이 손을 내미는가 싶더니 무성의 옷깃에 손을 넣었다. 예상치 못한 여인의 행동에 무성이 흠칫 놀라며 한걸음 물러섰다. 그런 무성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여인이 농염한 웃음을 흘렸다.
"이게 무슨...!"
"들고 있는 그거... 탕약 재료지?"
"뭐...?"
"거기에 살짝 넣도록 해. 그럼 일이 좀 더 수월해질 테니. 오호호호."
이번 여인도 자신의 할 말만을 마치고는 사라졌다. 그제야 무성은 자신의 품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성의 품 안에 담긴 건 약포지에 쌓인 소량의 가루약이었다.
"비상(砒霜)이라구요?"
약제사에게 성분이 무엇인지 확인한 무성이 놀라 소리쳤다.
"아이고,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것 같다는 것뿐이지요.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디에서 나셨길래 도리어 저에게 물으시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무튼 알겠습니다...."
약왕원을 나서는 무성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도대체 그자들은 누구이길래 나에게 이런 걸...'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무성의 머릿속에 목소리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힘을 가지고 싶으냐? 하지만 홍석근은 너에게 비급을 주지 않을 것이다."
무성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귓가에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를 털어내었다.
'그럴 리 없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그럴 리 없으실 거다.'
무성은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마음속 생각을 되새기며 무일봉으로 돌아갔다. 그게 벌써 며칠 전의 일이었다.
쏴아아.
탕약이 끓어오르며 거품이 넘치자 화들짝 놀란 무성이 황급히 약탕기를 집어 올렸다. 달궈질 대로 달궈진 그릇은 불에서 떼놓은 후에도 여전히 부글거리며 거품을 토해냈다. 그를 본 무성이 멍하니 있던 자신을 탓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사부님이 드실 시간에 맞추려면 앞으로도 한두 시간은 더 끓여야 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무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무일봉의 다른 동문들은 모두 잠자리에 든 야심한 시간이었다. 불이 꺼진 무일봉에는 어둠이 내렸고, 무성의 앞에 놓인 붉은 불빛과 사부님의 안채에 켜진 주홍 불빛만이 어둠을 몰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콜록, 콜록"
조용한 무일봉에 사부님의 마른기침 소리가 울렸다. 왜인지 모를 안쓰런 마음에 무성이 품 안을 뒤적였다. 무언가라도 가져다 드릴 요량이었다. 그런 그의 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꺼내보니 전에 받아둔 약포지였다.
무성이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자신이 가지고 있을 물건은 아니었다. 아니,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무성의 머릿속에 그날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내 너에게 원하는 것을 줄 것이다."
무성은 또다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생각을 지웠다. 애당초 받아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차라리 녹명촌에서 버리고 올 것이라며 후회를 하던 순간이었다. 그의 눈에 안채로 들어서는 누군가가 보였다.
'영묵 사형? 이런 시간에 사부님의 방엔 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무성을 감싸 안았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는 조용히 영묵의 그림자를 쫓았다.
무성이 안채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석근과 영묵의 대화는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내일 막내를 정식 제자로 들이려고 하니 네가 잘 가르쳐 주려무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전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돌아가거라."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영묵이 방을 나왔다. 영묵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숨긴 무성은, 막내가 정식 문파원이 된다는 말에 축하할 일이 생겼다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묵이 자리를 뜬 후 석근이 향한 곳이 의외였다. 단순히 침소를 향할 거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석근은 책장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홍문신공'
책의 겉표지엔 그리 적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안채로 뛰어들어간 무성이 석근에게 소리치듯 물었다.
"설마 그것을... 막내에게 주시려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나타나 묻는 무성의 모습에 놀랄 법도 하건만, 석근은 그런 기색 없이 무성을 바라보았다. 그가 숨어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석근은 마치 방금까지 대화라도 나누던 사람처럼 당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단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제가 아닌 막내에게 그걸 주신단 말입니까? 전 지금까지 그 비법을 얻기 위해 죽어라 노력해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저에겐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자신도 모르게 움켜쥔 무성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복수를 위한 힘은 힘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전 그 복수를 위해 지금까지 버텨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넌 영원히 홍문신공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홍석근의 단호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제야 무성은 진작 알았어야 할, 애써 외면해 왔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자는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이다.'
으스러질 듯 쥐고 있던 무성의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그와 동시에 무성의 온몸을 휘감고 있던 기운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알겠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침착해진 목소리로 무성이 대답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사 하고는 뒤돌아 방을 나섰다.
"너도 언젠간 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무성의 등 뒤에서 석근의 목소리가 슬프게 울렸다. 그러나 이미 마음의 귀를 닫아버린 무성에게는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힘을 가지고 싶으냐?"
녹명촌에서 만났던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무성의 귓가를 때렸다.
'그래, 난 무성이었다. 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겠다고, 그렇기에 이름까지도 무성으로 바꾸었건만... 이곳에 머물며 이들을 가족이라 여기려 하다니 참으로 한심하구나.'
무성의 주먹이 탕약 위로 올라가는가 싶더니 손가락이 서서히 펴졌다. 쥐고 있던 한 줌의 가루약이 쏟아져 내리며 탕약 안으로 녹아 들어갔다.
'내일, 까마귀를 날리면 검은 옷의 여인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난 이곳에 머무르리라.
다시금 이 자리에서 말한다.
'나는... 無. 무성이다.'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