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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길홍 - 갑남의 하루

글 : 이주희 / 그림 : 박형욱

길홍 - 갑남의 하루






"흐음…."


연무장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 사형제들을 바라보는 길홍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는 벌써 일 각째 휴식을 취한답시고 주저앉아 사형제들을 관찰 중이었다. 권각을 내지르며 초식을 익히고 있던 진영이 그런 길홍을 발견하고 땀을 닦으며 물었다.


"사형, 지금 뭐하고 있어요? 수련 안 해요?"

"기다려 봐봐. 내가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려."


대답을 마치자마자 길홍은 또 다시 다른 사제들을 번갈아 응시하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 뭐 하는 거람.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홍을 바라보던 진영은 제대로 된 답을 듣길 포기하고 다시 수련에 집중하였다.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다들 남다른 게 있는데 나만 없구먼. 다섯 명의 사제 중, 유일하게 자신만이 이렇다 할 특장점이 없다. 며칠 전 불현듯 깨달은 이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길홍에게 괜한 패배감만 안겨주고 있었다. 


길홍은 사형제들을 하나 하나 훑어보았다.

영묵은 곤족답게 육중하고 단단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도끼에 잔뜩 힘을 실어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한 마리 야수처럼 맹렬하고 위압적이다. 게다가 성격은 어떠한가? 진중할 뿐 아니라 깊은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그야말로 첫째라 할 만하다.


둘째 사형인 무성은 또 어떻고? 성격 있어 보이지만 건원성도 한복판에 가져다 놓아도 절대 기죽을 리 없는, 그 나름의 매력을 지닌 외모였다. 그뿐인가! 검술이면 검술, 권법이면 권법. 사부님에게서 배우는 것이라면 사형제 내에서도 으뜸을 자랑한다. 그야말로 숨겨진 일인자라 할 만했다.


그 다음 넷째 진영. 다른 것 다 제치더라도 홍문파 유일의 여제자가 아니던가? 성질도 있고 잔소리도 심하지만 문 내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씩씩하게 해내는 걸 보면 여장부란 바로 진영을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물론 요리를 잘 못하는 건 진영이 가진 사소한 단점 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실 그것도 진영의 특징 중 하나이긴 하니 상관없을 것 같다.


그리고 막내 화중. 밤톨만한 녀석이 어찌나 호기심 많고 욕심이 넘치는지. 무일봉에 있는 병기 중에서 녀석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을 터였다. 어찌 보면 만능이라는 단어는 무성보다 화중이 더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다 할 줄 알지만 사실 제일 잘하는 건 없는 어중간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아직은 어린 막내가 아닌가!


"뭐여, 그럼 난 뭐가 특출난겨…"


그렇다. 결국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결국 이렇게 귀결되는 것이다. 대체 나란 녀석은 남들보다 나은 게 무엇이 있는가? 아니, 홍문파의 제자들을 떠올릴 때 길홍 하면 아!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들 그 무언가가 있기는 한 것인가?


길홍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벌써 삼일 째 같은 결론이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풍과 운의 경계 지역에 살던 길홍네 가족은 전쟁에 휘말려 피난을 떠났더랬다. 문제는 길홍의 부모가 마을을 몇 리나 벗어나고서야 여섯 자식 중 셋째인 자신을 두고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형제들은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잊고 길을 떠났겠냐고 웃었지만 이건 거짓이라고는 단 한 푼도 섞이지 않은, 길홍의 아픈 과거였다. 사실, 길홍이 가족을 떠나 유랑을 시작하고 결국 홍문에 오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그 일이 발단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런 일이 그때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고향을 떠나 처음 건원성도에 발을 들였을 때, 의탁했던 객잔의 주인도 길홍의 얼굴과 이름을 제대로 익히는데 달포가 걸렸었다. 그뿐인가? 분명 점소이 일을 하며 수십 번은 마주쳤을 손님의 방에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가 도둑 취급을 받은 적도 있었다. 관청에 가서 몇 번이나 사정 설명을 하고 나서야, 손님은 지겹도록 보았을 점소이의 얼굴을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음을 인정했었다.

물론 '이제 보니 얼굴이 조금 익은 점소이 같다'라는 애매한 말은 남기고서.


따지고 보면 이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누구도 단 한 번에 길홍을 기억해 주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보통의 삶을 사는 갑남을녀에게 있어 별다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길홍보다 더 평범한, 그리하여 일 년을 보아도 돌아서면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희미한 자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이야기일 때나 허용되는 것이지, 막상 본인이 그런 처지라 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대의 명분까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무공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하는 자를 제자로 삼을 생각은 없다.'


처음 길홍이 홍석근에게 제자 삼아 달라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졌을 때 들은 말이었다. 그렇게 단호하게 자신을 거절했던 홍석근의 마음을 돌려 제자가 되기까지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온갖 잡일을 다하면서도 불평불만 한 번 하지 않는 성실한 길홍을 이제 그만 제자로 삼는 게 어떠냐고 영묵과 무성이 스승에게 고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길홍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대신 부엌 부뚜막 앞에 앉아 부채질이나 하고 있는 팔자였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으니 그래도 남들보다 나은, 다른 사람보다 눈에 띄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문득 돌아보니 결국 제자리였던 것이다.


이대로는 평생 무일봉을 하산할 일 조차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홍석근이 뭣 하나 빼어난 것 없는 제자를 위험천만한 강호에 덜컥 내보낼 만큼 물렁한 스승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물론 몇 해를 함께 하며 진짜보다 더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언제까지고 여기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언젠가는 떠나야 할 테고, 만약 그 때가 오면 적어도 길홍이라는 두 글자만으로 자신을 타인에게 각인 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길홍아, 수련은 다 마친 게냐?"


고민을 계속하고 있을 때, 굵직한 목소리가 길홍의 뒤통수로 날아들었다. 깜짝 놀란 길홍이 고개를 드니 영묵이 이마에서부터 뚝뚝 떨어지는 땀을 닦아내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 괜히 뜨끔한 마음에 허둥지둥 일어나던 길홍이 결국 앞으로 고꾸라지고야 말았다. 


"어허,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무슨 무공을 익힌다고 그래!"


결국 날아드는 사형의 불호령에 길홍이 뒷머리를 긁으며 일어섰다. 넘어지며 부딪힌 무르팍이 쓰렸지만 마뜩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형의 눈초리가 더 아픈 길홍이었다. 떨어뜨린 목검을 다시 쥐고 수련용 목각 인형 앞으로 다가서자니 영묵이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조금은 누그러진, 다정한 목소리.


"길홍아, 수련을 더 할 생각이 없으면 심부름이나 하나 하자꾸나."

"네? 심부름이요?"

"그래,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닌데 바쁘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사형,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시선을 피하시면 누가 믿겠습니까. 속으로야 투덜거렸지만 결국 길홍은 웃으며 영묵 앞으로 다가섰다.


*                            *                           *


천명절을 앞둔 건원성도는 다른 때보다 더 번잡하고 북적거렸다. 가게마다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길바닥 노점은 목을 잔뜩 빼고 기웃거려도 앞을 들여다 볼 수 없을 만큼 인파가 대단했다. 조금 좁은 골목을 지날라치면 몇 사람 어깨를 치고 지나야 하는 것 정도는 예사일 정도로 도시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길홍은 사람들에게 치이는 와중에도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꼭 끌어안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곧 천명절이니 우리도 제를 준비해야 한다. 무성이는 사부님께 하명 받은 일이 있어 제수용품을 준비할 수 없으니 이번엔 네가 가서 수고를 좀 해야겠다.


일 년에 한 번, 홍문의 제를 준비할 때면 제수용품 준비는 무성이 도맡아 했던 터라 길홍은 한 번도 그 시기에 도시로 온 적이 없었다. 출가 이후 한동안 건원성도에 머무른 적이 있는 길홍이었기에 별 부담 없이 왔건만 막상 와 보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변해 버린 도시의 위용에 길홍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였다.

게다가 이 시기의 건원성도에서는 소매치기가 판을 치는데 재수없게 털린다 해도 관원들이 해결해 줄 수도 없을 만큼 성도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는 터라 만사 조심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한 손에는 구매해야 할 제수용품이 빼곡히 적힌 종이가 들려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이미 사들인 제수용품들이 들려 있어 놀고 있는 손이 없다. 무엇보다 가슴팍에는 두둑한 금전 주머니가 들어 있는 지금, 그는 주변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물론 주변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쉴 새 없이 살피는 지금의 자신의 행동이 도리어 스스로를 누가 봐도 완벽한 뜨내기 같아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길홍은 알지 못했다. 


"어이,  거기 좀 서보시오."


제수용 과일을 파는 점포에 막 다다랐을 즈음,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보니 웬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 


"무슨 일 있어라?"

"흠, 당신 아까 저기- 고깃간에서 나오지 않았소?"

"제에 쓸 고기를 좀 사러 들렀구만여. 그런데 왜…."


음흉하게 길홍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던 사내가 헛기침을 하며 대꾸하였다.


"흠! 당신이 고깃간에서 다른 손님의 물건을 슬쩍 했다는 신고가 들어왔소."

"뭐, 뭐시여?! 멀쩡한 고깃간 손님을 누가 도둑으로 모는겨!" 


가뜩이나 도둑을 만날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차에 도둑 취급을 당하니 길홍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길홍이 버럭 하며 항의 하자, 사내가 한 손을 들어 그를 저지한다.


"아니, 그렇게 흥분할 게 아니오. 고깃간 유가가 도둑이 들었다는데 딱 당신이 그곳을 나갔다지 뭐요. 해서, 내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쫓아와 봤소."


사내는 이내 주머니에서 명패 하나를 꺼내어 길홍의 면전에 불쑥 들이 밀었다가 재빨리 다시 품에 넣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터라 무엇인지도 채 보지 못했는데 사내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거들먹거렸다. 


"오늘은 비번이라고 평복을 입어서 그렇지, 이래봬도 관원이오!"

"과, 관원?!"


관원이라는 말에 길홍이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무릇 관청이란 곳이 죄가 없어도 알아서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신기한 기운을 지닌 곳이 아니었던가? 길홍의 안색이 변한 걸 느꼈는지 사내도 조금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딱히 증거도 없고 당신도 아니라고 펄쩍 뛰니 한 번은 믿어드리리다. 다만 신원 확인은 필요하니 호패나 좀 보여주시오."

"자,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여기, 품에… 어, 어…?"


당황하며 황급히 품에 있던 호패를 꺼내려던 길홍의 손에서 제수용품이 떨어지려는 찰나, 사내가 재빨리 그것을 받아 다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길홍이 품에 있던 호패를 재빨리 꺼내어 보여주니 사내도 더는 말 없이 길홍의 어깨를 두드리고 뒤돌아 떠났다.


"참말로 다행이구만. 심부름 왔다가 괜한 일에 엮일 뻔 했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길홍은 이내 과일을 사기 위해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일상점 역시 다른 곳처럼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간 길홍이 간신히 제수용 과일 몇 점을 바구니에 담아 점원에게 전하자 과일을 세어 본 점원이 상냥한 미소와 함께 가격을 말해 주었다. 


"열 다섯 푼입니다, 손님."

"어따, 비싸고만. 잠시만 기다려 보시오. 열 다섯 푼이라… 어라…?"


물건 값을 주기 위해 품 안의 돈 주머니를 꺼내려던 길홍의 안색이 변했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가슴팍을 뒤적이는 모양새부터가 이상한 지 보자기에 싼 과일을 들고 있던 점원의 얼굴에 떠 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점차 사라진다. 당황한 길홍이 여기저기 뒤져보지만 돈 주머니는커녕 동전 한 닢조차 나오지 않는다. 


"설마 돈이 없는 겁니까?"

"아, 아니 그게 분명히 여기에 돈 주머니가… 어라, 어디 갔지…? 분명히 여기에…"


그때, 길홍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을 관원이라 칭하던 그 사내였다. 그 사내를 만나기 전, 즉 불과 일각도 지나기 전까지 분명 그의 가슴팍에는 돈 주머니가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 자가 관원이 아니라 소매치기였나?


"웜마, 이걸 어쩐다냐…"


*                    *                    *


"아이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꼴이 말이 아니구먼? 흐음, 그런데 자네 이름이..."

"어따, 길홍이 아니요. 암만 몇 해 만에 만났어도 이름 정도는 기억해 주셔라."

"아, 그래! 길홍! 미안허이. 요즘 늙어서 그런가 자꾸 깜박깜박하지 뭔가, 하하!"


돈 주머니를 홀랑 잃어버리고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황하던 길홍의 발길이 닿은 곳은 몇 해 전 그가 점소이로 일하던 객잔이었다. 처음엔 일단 몇 푼이라도 빌려볼까 해서 찾아갔지만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해 주지 못하는 걸 보니 택도 없는 소리였다. 결국 길홍은 객잔 탁자에 몸을 기댄 채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그런 그가 안쓰러웠는지 주인도 옆 의자에 털썩 내려앉았다.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어. 요즘 이 동네 말이 아니야. 세상이 흉흉해지니 도둑놈들이 더 날뛴다니까?"

"약 올리시는 게요? 이대로 제수용품 못 사가면 사형이 날 죽일 지도 모르는디…"


측은한 듯 길홍을 바라보던 주인이 문득 뭔가 생각이 난 듯 길홍의 팔을 잡아 끌었다.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보던 주인이 길홍에게 작게 속삭였다.


"여보게, 길홍. 자네는 딱 봐도 어수룩하니 그대로 돌아다니면 고놈들이 또 덤벼들 거야. 내가 옷 한 벌 빌려줄 테니 갈아입고 돈 많은 허당인 척 이 근방을 어슬렁거려보는 게 어떤가?"

"에이, 그게 통할 리 없지 않소. 한 번 턴 사람을 또 터는 바보가 어디 있겠소."


길홍의 말에 주인이 짓궂게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날 믿어 보게. 자네 정도면 당장 뒤돌아도 기억이 안 날 거라고 내 장담하지!"   


*                    *                    *


길홍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거리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당장 뒤돌아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거라니, 이보다 자존심 상하는 말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래도 일단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선 길홍이다. 하지만 어떤 바보가 한 번 털었던…


"어이, 이보쇼."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길홍의 등 뒤로 들려왔다. 설마 하고 뒤를 도니 불과 한 시진 전에 자신에게 관원 행세를 하던 자가 그때와 별 다를 것 없는 낯빛을 한 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허허, 진심으로 그런 바보가 있었고만?


"왜 그러십니까?"


길홍이 짐짓 모른 척 사내의 말에 응답했다. 사투리는 말끔히 지운 도시 사람의 어투였다. 길홍이 대꾸하자 사내가 예의 거들먹거리는 모양새로 다가섰다.


"거, 혹시 아까 저기 잡화점에 가지 않았소? 거기 주인이 당신이 다른 사람 짐을 털었다고 신고를 하더이다."


오호라, 이제 보니 사람의 행색에 따라 던지는 떡밥이 다르구먼? 하지만 길홍은 내색 하지 않고 당황한 척 호들갑을 떨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엄한 사람 잡지 마십시오!"

"허허, 아니면 아니지 뭘 그렇게 화를 내는 게요. 사실 내가 이 구역 관리 관원인데, 마침 아는 장사치가 도와달라기에 쫓아와 본 것 뿐이외다."

"헉! 과, 관원이요!


길홍이 당황한 듯 하자, 사내는 더욱 더 거들먹거리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놀라고 당황한 척 하던 길홍이 문득 생각난 듯 사내에게 물었다.


"헌데 무슨 관원이 관복도 안 입고 사람을 취조하십니까? 정말 관원이 맞긴 한게요?"

"허허, 명패를 보여줘야 믿겠소?"


그런 의심 많이 받아 봤다는 듯 씩 웃은 사내가 품 안에서 패 하나를 꺼내더니 재빨리 길홍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색만 붉다 뿐이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나무 패였다. 이전에는 당황하여 그 패를 제대로 볼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히 확인한 길홍이 주머니 속에 패를 넣으려던 사내의 손목을 낚아챘다. 갑작스러운 길홍의 행동에 당황한 사내가 되려 소리를 질렀다.


"뭐, 뭐하는 짓이야! 당장 안 놔?"

"허허, 어디 감히 진짜 관원 앞에서 관원 흉내를 내!"


길홍이 으름장을 놓자,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허옇게 질렸다. 길홍은 품에서 붉은 명패를 꺼내어 사내의 눈 앞에 떡 하니 들이밀었다. 명패에는 품계와 이름도 적혀 있어 얼핏 보면 진짜 관원의 것 같아 보였다. 이를 본 사내의 낯빛이 변하기 시작한다.


'대체 복씨 아저씨가 이런 가짜 명패는 어찌 갖고 있는 거래. 뭐 어쨌든 효과는 있구먼!'


길홍은 잔뜩 힘을 준 얼굴로 사내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당신을 계속 미행했는데 오늘 하루 동안 총 세 건의 절도를 저질렀더군. 요즘 같은 시기에 감히 성도에서 소매치기를 하다니 간이 아주 배 밖으로 나온 거 아니오? 현행범이니 당장 관으로 갑시다. 내, 몇 달은 감옥에서 썩게 해 주겠소!"


길홍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가 그의 앞에 넙죽 엎드려 싹싹 빌기 시작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은 딱 한 건! 한 건뿐입니다. 게다가 아직 그 돈은 한 푼도 쓰지도 않았다고요. 어르신, 이걸 돌려 드릴 테니 한 번만 봐 주십쇼. 저도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고요. 제발 좀 봐 주세요."


오호라. 다행히 돈은 쓰지 않았다고 했것다. 길홍이 억지로 웃음을 삼키며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좋소. 일단 그 돈을 내게 주면 오늘 당신이 저지른 죄는 감해 주도록 하지."


사내는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길홍의 손에 돈을 쥐어주고는 꽁지 빠져라 도망쳐 버렸다.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길홍은 돈 주머니를 열어 돈을 확인 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단 한 푼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휴, 도시 말 참말로 힘들었구먼. 그럼 이제 다시 볼 일을 보고 돌아가 볼까?"




길홍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콧노래까지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제수용 생선을 살 차례였다.


*                    *                    *


늦은 밤, 무일봉 안채의 불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고 밝기만 하다. 길홍이 늦게 돌아온 탓에 느지막이 먹기 시작한 저녁 식사가 이제 막 끝나던 참이었다. 하지만 식사를 하면서 시작한 길홍의 모험담은 식사를 끝마친 후까지 이어졌다.


"진짜 사형을 몰라봤어요? 와, 도시 사람들 눈 나쁘네."

"그러게 말이에요. 어떻게 저런 독특한 외형을 잊을 수 있지? 쭉 찢어진 눈! 반듯한 반반 가르마! 게다가 저 구수한 사투리!"

"야야, 두 번째 만났을 땐 사투리 안 썼어야. 혹시 또 아냐, 눈은 어두워도 귀는 밝을 지." 


길홍의 말에 무성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셋째야."

"아따, 무성 사형은 또 왜 그러십니까! 안 그래도 뭐 하나 특출 난 게 없어서 속상해 죽겄어요. 이 길홍이야말로 진정한 갑남을녀의 표상 아니겄습니까?"


무성의 말에 길홍이 투덜거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영묵이 미소 띤 얼굴로 대꾸한다.


"눈에 띄지 않으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좋지 않겠느냐? 눈에 띄는 자들은 적들에게도 잘 보이는 법이니까."

"어이고, 전 싫습니다. 누가 봐도 저 자는 길홍이다, 그리고 어떤 무공을 잘 허니 조심혀야 한다, 이런 말을 듣고 싶다니까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으니 자꾸 작아진단 말이여라."


풀죽은 길홍의 말에 영묵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약관은 훨씬 지난 어른인데도 셋째여서일까. 사제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귀여울 때가 있는 영묵이었다. 


"우리 셋째, 내세울 게 없다고 누가 그러드냐? 난 셋째가 하는 밥이 제일 맛있다."

"전 우리 사형만큼 잠을 많이 자는 사람 본 적 없어요."

"아무렴! 사형만큼 깨우기 힘든 사람도 없지."

"다들 알겠지만 무일봉 가축들 중에서 길홍이 안 챙기는 놈들이 없다. 길홍이는 우리 문파 최고의 사육사 아니겠니."


화중과 진영이 옆에서 거들자, 무성까지 한 소리한다. 그 후로도 제자들은 앞다투어 말을 내뱉느라 바빴다. 가르마를 잘 탄다. 토속어에 강하다. 도시말 흉내를 잘 낸다. 등등. 듣고 있자니 이게 놀리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어 점점 더 민망해지는 길홍이다.


"그, 그만하시랑게요. 자꾸 그러면 밥이고 뭐고 확 가출해 불랍니다!"

"어이쿠! 셋째가 화가 많이 났구나. 자자, 그러니 다들 진짜 장점만 말해주도록 하자!"

"나부터 할래요!"

"어허, 화중아! 넌 제일 마지막이다."

"아 왜요오오오~"

"그, 그만들 하셔라!"

"옳거니! 너는 도시 말도 사투리도 다 할 줄 아는 능력자다, 셋째야."

"와, 정말 멋져부려요- 오, 이렇게 말하면 돼요?"


그저 순하기만 한 셋째를 놀리듯 아끼듯 애정이 실린 제자들의 장난이 깊은 밤으로 들어서는 무일봉 산자락을 울린다.


갑남 아닌 갑남, 길홍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end


  • 2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이올하 [도 슬복] 길홍사형 사투리 좋아하는데...헝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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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마우스팔콘즈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그러고 보니까 진짜 길홍 누구였지 자경단 그 배신자였나 했었다

    영묵은 일단 생긴게 압도적이고, 진영이랑 화중은 수십번씩 보니까 기억하고

    무성은 매주 마천루가서 뚜드려패니까 잊어버릴래야 잊을 수도 없고

    길홍은...음...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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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X킹 [길홍이형] 와..써준게 어디여.속편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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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피 [천서] 길홍사형 댓글수 안습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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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변의아들 [해변의자식]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길홍이 누구였지....많이 들어본 NPC같은데....하고 들어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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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phaels [유천살성] 댓글이 왜이리 적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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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나 [외 않데] 사형.... 훈남이셔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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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몽 [단희온] 필터링 너무 많이 걸려.. 죄다 **이야...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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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틱틱앙 [깐돌쭈] 무일봉 가축... 홍사부 책상 위에 있던 강아지가 생각남.. 넘귀여워....
    지금도 무일봉 가축들 돌아다니나?? 근데 왜 강아지나 말은 무일봉에만 있고 다른 덴 없지???
    험한 무림엔 동물도 못 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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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폰 [늰징] 무림엔 고양이가 너무많아 다른 가축이 배겨나질못함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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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틱틱앙 [깐돌쭈] 뭐지?! 길홍사형 삽화에선 엄청나게 매력남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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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체 [검의 이단자] 암살했으면 크게됐을듯..<br />누가 암살당했는데 대낮에 그냥 대놓고 <br />암살해도 목격자들이 누군지 모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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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질리아나 [너말고니형님] 헉...진심ㅋㅋㅋㅋㅋㅋ암살자 너무 잘 어울려욬ㅋㅋㅋㅋㅋㅋ얼굴 기억 안나는 암살자...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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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체 [검의 이단자] 패시브 은신이 자체 특성같은데<br />왜 검사를... 직업을 잘못골랐네 길홍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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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정 [절정] 재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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