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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수삼 - 지란지교(芝蘭之交)

글 : 주나영 / 그림 : 박형욱

수삼 - 지란지교 (芝蘭之交)





푸른 초원이 펼쳐진 바람평야, 붉은 도복의 혼천교도 들이 무림맹 막사 주위로 속속 집결한다. 마치 붉은 물결이 흐르는 듯 빠른 몸놀림이다.

수삼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숨을 죽이고 풀숲에 몸을 숨긴 채 무림맹 막사를 에워싸고 있다.

혼천교에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수삼에게 맡겨진 첫 임무는 그의 두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 뿐이었다.

 

“이봐, 긴장되나?”

 

복면을 쓴 조원이 물었다. 수삼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조원은 수삼이 들으라는 듯 홀로 중얼거렸다.

 

“첫 임무가 무림맹 막사 습격이라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쉿, 소리를 죽이게.”

 

습격조장이 주의를 주었다. 수삼은 숨까지 참아가며 막사를 지키는 수호대의 수를 세어보았다. 어림잡아도 열 명은 족히 넘을 것 같다.

영석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막사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수삼에게는 한없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이제 시작이야... 조만간 무림맹 녀석들의 수가 곱절은 더 불어나겠지. 그러니 그 전에 싹을 잘라둬야 하네.”

“거 참. 바늘과 실도 아니고. 혼천교 가는 곳에 무림맹은 늘 따라다니는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습격조장은 나직이 혀를 찼다.

그때 수삼 주위로 세 명의 조원들이 슬며시 다가왔다.

 

“이렇게 작은 녀석이 혼천교에 들다니…”

“무림맹을 잡을 수나 있겠나? 잡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걱정말게. 이리 작은데 쉽게 잡힐 리가 있겠나? 쥐새끼처럼 아주 잘 도망다닐 걸세. 크크.”

 

수삼은 삼인방을 흘겨보았다. 덩치 큰 삼인방은 혼천교에서도 다른 신도들을 괴롭히기로 악명 높았다. 무공으로는 수삼도 뒤지지 않았으나 그들의 계급은 수삼보다 높다. 괜한 시시비비에 휘말렸다가는 피곤한 일들만 잔뜩 쌓일 게 분명했다.

수삼은 묵묵히 눈앞의 적들을 응시했다. 지금은 삼인방의 빈정거림에 일일이 대꾸할 때가 아니었다.

습격조장은 수삼을 향해 으르렁거리던 삼인방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삼인방은 겁먹은 강아지 마냥 꼬리를 내리고 물러났다.

 

“모두 준비 됐나?”

 

조원들은 대답대신 모두 돌격 태세를 취했다. 조장은 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이윽고 조장이 손짓하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풀숲 밖으로 튀어나갔다. 수삼도 다른 조원들을 따라 튀어나갔다.

여기 저기서 짧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혼천교의 습격에 대비하지 못한 무림맹원들의 비명소리이리라. 수삼은 비명이 나는 곳을 외면한 채 양손에 기를 모아 눈앞의 막사를 향해 날렸다. 하지만 기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공격이 먹히지 않은 것이다.

힘이 부족했던 것일까.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제길… 함정이다!”

 

조장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네놈들이 습격할 걸 모를 줄 알았나?”

 

막사 깊은 곳에서 가녀린 체구의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여인의 발 밑으로 펼쳐진 항마진이 보였다. 공격이 통하지 않은 이유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수삼은 손에서 기를 거두었다. 어차피 공격해봤자 무용지물일 터였다.

그 사이 무림맹 수호대의 거미줄에 걸린 조원들은 모두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수호대는 자신들의 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무공에 한껏 힘을 실었다.

여인은 수삼 앞에 멈춰 서서 수삼을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꼬맹이까지 참전시키다니… 과연 근본 없는 집단답군.”

“입조심해라. 날려버리기 전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도사의 기운은 수삼의 그것을 상회했다. 여도사는 수삼의 말을 무시한 채 한 손에 기를 모았다.

 

“고통 없이 깨끗하게 끝내주마.”

 

이렇게 죽는 것인가.

수삼은 여도사를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혼천교의 습격은 실패다. 그야말로 무림맹의 완벽한 승리였다.

수삼은 고개를 떨구었다. 첫 임무에서 목숨을 잃게 되다니, 무력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에 진저리가 났다.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셈이었나? 혼천교도 별 거 아니었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붉은 불꽃이 날아와 여도사의 손에 적중했다. 여도사는 손을 부여잡고 씩씩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냐!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와라!”

 

여도사는 씩씩거리며 허공을 향해 염을 난사했다.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를 바라던 여도사의 기대와는 달리 돌아온 건 멀리서 터진 염의 폭발음뿐이었다. 수삼은 아군일지도 모르는 상대가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이윽고, 연이은 공격에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사이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고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오호호! 꼬마야, 어른들 싸움에 끼어들다니 제법이로구나.”

 

한껏 소년을 비웃던 무림맹 여도사는 이어서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장난은 여기까지. 다치고 싶지 않으면 저리로 물러가는 게 좋을 거다.”

“무림맹 녀석치고는 배짱이 두둑한걸? 혼천교였다면 제법이라고 칭찬해줬을 텐데 무림맹이라 칭찬해줄 수도 없고, 참.”

소년의 비아냥거림에 여도사의 얼굴은 노기로 물들었다. 여도사는 입으로 주문을 웅얼거리더니 거대한 마령을 소환해 냈다. 수삼을 비롯한 모든 혼천교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령과 소년에게 쏠렸다.

여도사의 손가락이 소년을 향하자 마령이 주저 없이 소년에게 돌진했다. 수삼은 있는 힘껏 외쳤다.

 

“위험해! 피해!”

 

굉음이 드넓은 평야에 울려 퍼졌다.

수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참담하게 당해버린 소년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게 끝? 시시하기는.”

 

소년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수삼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다음 순간 이어지는 무공의 향연. 

소년은 엄청난 기세로 수호대를 하나 하나 쓰러뜨렸다.

수삼은 생전 처음 보는 무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년의 무공은 유려하면서도 절도 있고, 무지막지한 듯하면서도 섬세했다. 그 황홀한 흐름에 수삼은 넋을 잃고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소년은 지치지도 않는 듯, 달려드는 수호대를 모조리 상대했다.

모든 수호대를 처리한 소년은 그때까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수삼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수삼은 소년이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맙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다가는 제일 먼저 목이 날아갈걸.”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거미줄에서 풀려난 다른 조원들은 멀리서 소년의 눈치만 살필 뿐 쉽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넌 누구냐? 무슨 꿍꿍이지?”

 

조장이 검을 겨눈 채 물었다. 소년은 한숨을 탁 쉬었다.

 

“내가 누구인지가 그렇게 중요해? 목숨만 건졌으면 된 거 아냐?”

 

조장은 검을 거두었다.

 

“실례를 범했소. 우선 감사의 인사부터 올려야겠군.”

“됐어. 인사나 받자고 한 일은 아니니까. 그저… 너희 혼천교만… 무사하면 됐다고.”

 

소년은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수삼은 이토록 훌륭한 전력이 혼천교에 든다면 얼마나 든든할지 상상해 보았다. 게다가 자신과는 동문이 될 것이 아닌가. 그의 무공은 혼천교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다. 그에게는 분명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수삼은 소년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난 수삼이라고 한다. 네 실력이라면 혼천교에 큰 전력이 될 것이다. 함께 혼천교에 가지 않겠나?”

 

소년은 수삼을 빤히 쳐다보았다. 앳된 외모의 자그마한 린족이 애어른 같은 말투를 구사하며 손을 내밀었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흐응… 혼천교라…”

 

잠시 생각하던 소년은 이내 짓궂게 미소 지었다.

 

“좋아. 안내해 줘.”





*





 습격조를 구한 공으로 소년은 아무런 절차 없이 즉시 혼천교 신도가 되었다. 몇몇은 소년에 대한 처우를 아니꼬운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했지만 소년의 기운에 되레 주눅이 들어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수삼은 소년을 데리고 혼천교 본교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소년은 신기한 듯 건물 구석구석을 관심 있게 들여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못 들었군. 이름이 뭐지?”

“참 일찍도 묻네.”

 

소년은 두 손바닥을 깍지 낀 채 뒤통수에 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화무… 량.”

“화무량?”

 

참 예쁜 이름이다.

 

“그럼 무량이라 부르면 되나?”

“뭐, 좋을 대로.”

 

수삼은 동생이 생긴 것만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는 수삼과 소년이 비슷한 또래로 보였겠지만 말이다.

 

“여기 있었군, 꼬맹이.”

 

삼인방이었다. 삼인방은 수삼과 무량을 둘러싸고 이죽거렸다.

 

“혼천교가 거저 들어오는 곳인 줄 아나?”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정식 비무로 우열을 가리기 전까지는 우리가 네 선배다.”

“자, 어서 깍듯하게 선배, 라고 불러 보라고.”

 

무량은 무표정으로 일관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삼인방은 무량이 보인 의외의 태도에 적이 당황한 듯 보였다.

 

“어쭈, 요것 봐라? 이래도 선배라 부르지 않을 테냐?”

 

삼인방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무량을 압박해왔다. 수삼은 절로 주먹이 쥐어졌지만 조금만 더 참자고 되뇌었다.

 

“말로 해선 안 되겠다. 에잇!”

 

삼인방 중 가장 덩치 커다란 녀석이 무량을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저 멀리 날아가버린 건 수삼도 무량도 아닌 삼인방이었다. 수삼의 강력한 한 수였다.

수삼은 즉시 기를 거두었다. 삼인방의 괴롭힘을 묵묵히 견뎌내던 지난 시간보다 무량을 괴롭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의 화를 더욱 돋우었던 것이다.

무량은 깜짝 놀란 눈으로 수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일단 저지르고 나자 묘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너…! 감히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냐!”

 

삼인방 중 하나가 씩씩거리며 일어섰다. 수삼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고, 무량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삼인방은 저마다 목이며 배를 부여잡고 부리나케 사라졌다.

수삼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왜 그래?”

“휴, 이제 처벌은 면할 수 없게 됐군.”

“처벌?”

“정식 비무도 아닌데 같은 신도끼리 싸움을 벌였으니 곧 징계가 내려지겠지.”

“하지만 저 녀석들이 먼저 우릴 건드렸잖아.”

 

수삼은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선배의 말에 불응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흐응. 인간이란 복잡해. 그런 게 위계질서란 건가?”

 

수삼은 복잡한 표정으로 무량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인간이면서 누가 누구더러 복잡하다는 건지.

이윽고 수삼 앞으로 혼천교 중급 신도 두 명이 나타났다.

 

“수삼, 화무량. 같이 가 줘야겠다.”

 

올 것이 왔다. 수삼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수삼과 화무량. 둘은 함께 수련하는 수련생들에게 무공을 가해 부상을 입혔다. 둘을 본당에서 사흘간 면벽수련에 처한다.”

 

면벽수련은 오직 벽을 면한 채 침묵하는 수련으로 보통 신출내기들이 실수를 했을 때 가해지는 처벌이다.

교관의 말을 들은 삼인방은 히죽히죽 웃으며 고소하다는 듯 수삼과 무량을 쳐다보았다. 억울하긴 했지만 삼인방을 공격한 것은 엄연한 사실. 있는 사실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교관에게 사정을 이야기한들 통할 리 없다.

 

“할 말 있나?”

“없습니다.”

 

수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떳떳하게 답했다. 수삼과 무량의 항변을 기대했던 삼인방은 김이 샜는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교관은 나직이 한숨 쉬며 말했다.

 

“혼천교를 짊어지고 가야 할 녀석들의 기강이 이리 해이해져서야…”

 

말을 마친 교관이 앞서 본당을 향해 걸어갔다. 수삼과 무량은 느릿느릿 그 뒤를 따랐다.





*





 “고마워, 수삼.”

“무량, 넌 내 생명의 은인 아니냐? 이 정도 호의야 당연지사지.”

 

수삼은 괜히 뿌듯한 마음에 어깨를 으쓱했다. 무량은 수삼의 행동에 씨익 웃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면벽수련이라니 너무 지겨운데. 혼천교도 이만큼 둘러봤으니 됐고… 수삼, 나랑 밖에 나갈래?”

“지금? 방도가 있나?”

“다 수가 있지. 잠깐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봐.”

 

수삼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무량이 시키는 대로 멀찍이 떨어졌다.

무량은 팔을 움직여 기운을 모았다. 잠시 후 무량의 온몸이 황금빛으로 둘러싸이더니 그 빛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빛은 거대한 네 발 짐승으로 변하여 본당의 천장을 뚫고 끝도 없이 커져갔다. 본당이 무너지면서 천둥이 치는 듯 요란한 소리가 밤하늘 가득 울려 퍼졌다.

수삼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고개가 꺾어져라 네발 짐승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사라지자 세 개의 머리가 일제히 수삼을 향해 내려왔다.

 

[얌전히 있어.]

 

하나의 머리가 수삼을 물어 제 등에 던졌다. 등은 매끈하고 푹신했다.

 

[꽉 잡아라.]

 

짐승은 천천히 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삼은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짐승의 등에 매달렸다.

소리를 듣고 몰려온 신도들은 거대한 짐승의 등장에 할말을 잃은 듯 멍하니 짐승이 날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짐승은 바닥을 박차고 힘차게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





 [이만 눈을 떠도 된다.]

 

수삼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 거대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짐승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겁먹을 것 없다.]

“너… 무량인가?”

[내 진짜 이름은 화무룡이다. 혼천교를 수호하는 수호룡이지.]

“화무룡…”

 

수삼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화무량의 정체가 다름아닌 신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혼천교를 수호하는 수호룡이었다니.

 

“그날… 바람평야에서는 왜 도와준 거지?”

[내 사명은 혼천교를 수호하는 것. 그러니 혼천교를 돕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군.”

 

그래서 그때 혼천교만 무사하면 됐다고 했던 거구나. 수삼은 그제야 무량의 모든 행동들이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지켜야 하는 존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혼천교에 들어오라는 네 제안은 꽤나 솔깃했지.]

“그래서… 어땠나? 혼천교는.”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웠다. 모두 자신을 단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위계질서 따위를 내세우기에 바쁘니… 그냥 내 무공으로 모두 쓸어버릴 걸 그랬나.]

 

화무룡의 일침은 수삼의 마음 한구석을 쿡 찔렀다. 늘 가슴에 품어왔지만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그래도 네 덕에 인간 중에서도 제법 괜찮은 녀석이 있단 사실을 깨닫게 됐다.]

 

수호룡의 오른쪽 머리가 수삼의 머리 위에서 수삼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눈빛이다.

수삼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찬 밤공기를 맞자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지만 태어나 처음 하늘을 날고 있단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대지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이대로 아주 멀리,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까지 날아간다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한참을 날던 화무룡이 돌연 입을 열었다.

 

[잠깐. 내 등을 꽉 잡아라.]

 

화무룡은 황급히 고도를 낮추어 강하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바람에 수삼은 하마터면 날아갈 뻔했지만 온 힘을 다해 화무룡의 등을 끌어안은 덕에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잠시 후 화무룡은 사막 위에 착지했다. 사방으로 모래가 날린 탓에 수삼은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다. 화무룡.]

[이런 데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벽무룡.]

[네 기운이 느껴졌다.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너야말로 무슨 꿍꿍이인 줄 모르겠군.]

 

수삼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또 다른 거대한 삼두룡이 눈에 들어왔다. 외양은 같았으나 그것은 화무룡의 검붉은 색과는 확연히 다른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화무룡은 혼천교의 수호룡. 그렇다면 저것은, 무림맹의 수호룡이리라.

두 수호룡은 사막 위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깬 건 화무룡의 등에 앉아 있던 수삼이었다.

 

“자네들 쌍둥이인가?”

 

두 수호룡은 동시에 수삼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꼬마는 뭐지?]

 

푸른 용, 벽무룡이 물었다.

 

[혼천교 인간이다. 만약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벽무룡은 흥미롭다는 듯 수삼을 쳐다보다, 수삼의 질문에 찬찬히 답해 주었다.

 

[질문에 답하도록 하지. 네 말대로 우린 쌍둥이다. 그런데 몸 빛깔이 어째서 다르냐고 묻는다면, 기질 탓이라고 해두지.]

[지금 네 기질이 물같이 유하고 온화해서 푸른색이라 말하고 싶은 거냐?]

[잘 알고 있군. 그래서 불 같고 급한 기질의 너는 검붉은 색이 되었지.]

 

화무룡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인간 모습도 마찬가지로 성정이나 기질이 반영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화무룡의 대답에 이어 벽무룡이 말했다.

 

[네녀석은 너무 혈기왕성해서 탈이다. 언제까지 소년의 모습으로 활보할 텐가?]

[그러는 너는 언제까지 은둔노인 행세를 할 셈이지?]

 

둘은 계속해서 티격태격 했다. 아마도 만나기만 하면 이리 싸우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혼천교와 무림맹과 진배없어 수삼은 웃음이 나왔다.

그러던 중, 수삼은 무림맹 수호룡의 등 위에 얹어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벽무룡의 푸른 등에 푸른색 도복을 입은 인간이라니, 알아채지 못한 게 당연하다.

 

“화무룡, 벽무룡도 인간을 업고 있는데.”

 

화무룡의 목이 벽무룡의 등쪽으로 쏠렸다.

 

[벽무룡, 네 등 위에 그건 인간인가?]

 

벽무룡은 가운데 머리를 화무룡쪽으로 기울인 채 잔뜩 경계하듯 말했다.

 

[무림맹원이다. 혼천교에 쫓기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것을 내가 구해주었다.]

 

맹원은 기절한 듯 보였다. 혼천교에 쫓기다 절벽에서 떨어졌다니. 혼천교에 든 이래 보아온 무림맹원이라고는 바람평야 습격 때 상대했던 이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혼천교인 수삼을 죽이려 들었다. 수삼은 자연스레, 무림맹은 혼천교를 위협하는 집단이라 여기게 되었고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그들을 공격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와 정 반대이지 않은가.

수삼은 벽무룡의 등에 있는 무림맹원을 쳐다보았다. 맹원은 정신을 잃은 채 죽은 듯이 쓰러져 있다. 그것이 혼천교 탓이라 생각하자 괜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진정으로 무림맹을 증오하기에 수삼의 마음은 아직 충분히 여물지 못했다.

화무룡이 날개를 활짝 폈다. 묵묵히 화무룡을 바라보던 벽무룡은, 막 날개를 움직이려는 화무룡에게 걱정 어린 어조로 타일렀다.

 

[화무룡. 수호룡의 본분을 잊어선 안 돼. 우리의 역할은 두 세력을 지키는 것. 그들이 널 분노케 한다 하여 자신이 지켜야 할 세력에 도리어 위해를 가한다면 필시 좋지 않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 네게 이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다.]

[그럼 아무리 화가 나도 꾹 참으란 소린가?]

[당연하다. 우리는 ‘수호룡’이니...]

 

화무룡은 그 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벽무룡의 조언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잔소리는.]

 

화무룡은 그대로 벽무룡을 지나쳐 대사막을 벗어났다. 벽무룡은 멀어져 가는 화무룡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네 혈기가 오히려 스스로를 잡아먹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쯧쯧…]

 

벽무룡은 등에 쓰러져 있는 인간이 다칠 새라 조심스레 날개를 펼쳐 모래바람을 헤치고 사라졌다.





*





 대륙을 한 바퀴 돌아본 수삼과 화무룡은 혼천교 본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수호룡에 대한 예의나 환대가 아닌 매서운 질타였다.

 

“화무룡! 본당을 부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수호룡이라는 존재가 적아를 구분할 줄도 모르다니!”

“너 때문에 잔해에 깔린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어!”

 

호법은 화무룡을 둘러싸고 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봉하는 진이었다.

 

“네놈은 골칫덩이였어. 그래서 여태까지 모두에게 존재를 숨겨왔던 거다. 그런데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줄이야…!”

[가소롭군. 애당초 지켜달라며 울부짖은 건 너희들이었다. 헌데 이젠 직접 통제하시겠다?]

 

화무룡은 코웃음 치며 크게 날갯짓 했다. 호법들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저 멀리로 나가떨어졌다. 그 사이 수삼은 급히 화무룡의 등에서 도약하여 땅에 착지했다. 화무룡의 몸부림에 신도들은 급히 공격 태세를 취했다.

 

[감히 수호룡에게 공격을 퍼부으려 하다니… 이런 이기적인 녀석들!]

 

화무룡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화무룡의 진노한 음성이 대지 구석구석 울려 퍼졌다.

 

[너희들이 은혜와 분수를 모르고 제멋대로 군다면, 나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화무룡은 길게 포효하며 지면으로 강하했다. 삽시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화무룡의 돌진을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죽고 말 것이다.

 

“화무룡… 아니, 무량. 제발 멈춰!”

 

화무룡이 다음 공격을 발하기 직전이었다.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온 수삼은 하늘을 향해, 화무룡을 향해 있는 힘껏 외쳤다.

 

[비켜라. 너까지 희생시키고 싶진 않다.]

“벽무룡의 말을 잊었나? 네가 수호해야 할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네 말대로 우린 이기적이고 부족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수호룡이라는 존재가 필요한 거라고!”

 

화무룡은 침묵했다.

설득이 통한 것일까. 수삼은 숨을 죽이고 화무룡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늘은 널 봐서 돌아가겠다. 하지만 인간들이 또 다시 날 화나게 한다면… 그땐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군.]

 

화무룡은 거대한 날개를 펼쳐 반대편 하늘로 날아갔다. 수삼은 화무룡이 밤하늘에 완전히 잠겨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간다면 언젠가, 화무룡은 혼천교와 등을 지게 될 것이다. 혼천교에 있어 중요한 것은 신의나 도리보다는 실리와 강한 힘이었다.

강한 힘을 원하는 혼천교이니, 만약 수호룡을 뜻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혼천교의 정신은 화무룡의 불 같은 성정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 것이다.

수삼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워졌다. 언젠가 정말로 혼천교가 위기에 처하고, 수호룡의 도움이 필요해져 손을 내민다면 화무룡은 순순히 그 손을 맞잡아 줄까.

울고 싶은 수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화무룡이 사라진 방향에서 별똥별이 떨어졌다.




  • 1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최후의로또핵련장 [히브리스 에키드나] 벽무룡도 뭔가 뒤가 구리긴하네요 인간들의 생김새가 성정이나기질로 생긴다니 눈매가 나쁜사람은 모두 악당이라고 말할녀석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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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ak0002 [본매바] 저번 서고에서 겁나 까길래 쓰레긴줄 알았거니 매력 철철이넹. 근데 신도들 인성 상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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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ystory [또오레스] 음.. 화무룡 완전 매력적이네<br />혼천으로 하길 잘했어ㅎㅎ<br />템 빨리 맞춰서 쌍룡 보러 가야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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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희씨 [석희씨] 혼...혼천으로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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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틱틱앙 [깐돌쭈] 근데 왜 무림맹은 할배고 혼천교만 훈남임.... ㅠㅠ.. 그렇잖아도 혼천 수가 더 많은ㄷ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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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르카나 [천사아리] 템빨이 후져서 쌍룡 구경도 못해보네.=_=....
    쌍둥이인데 저렇게 사이가 후져서야 원, (그래도 벽무룡은 화무룡을 아끼는 듯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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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상태 [천서] 오늘부터 혼천교로 이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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