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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동진아 – 맹약 (盟約), 2화

글 : 주나영 / 그림 : 박형욱

동진아 – 맹약(盟約)




***





“육지에 내려주겠다. 돌아가라.”


소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 지옥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은혜를 갚겠다지 않았나? 역시 말뿐이었군.”


소녀는 머뭇거리며 자신의 손에 들린 총을 내려다보았다.


“은혜를 갚고 싶다면 살아남아라. 그리고 살아남으려면, 우선 널 그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부터 해야겠지. 또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복수… 라고요?”


복수. 그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남자는 소녀가 듣건 말건, 총을 사용하는 법을 상세히 일러주었다.

그 동안 소녀는 자신을 핍박했던 마을 사람들을, 촌장을, 사마교도 노인을 생각했다. 부모님이 사라진 것도,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 것도 모두 그들 탓이었다. 적의의 사마교도 노인이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고, 이처럼 누군가의 손에 생을 맡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게 그들 탓이라 생각하니 분한 마음이 일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무렵 배는 육지에 다다랐다.

소녀는 육지에 발을 디뎠다.




***




마을 사람들은 귀신이라도 본 양 소녀를 쳐다보았다. 거센 물살이 바위를 만나 반으로 갈라지듯 사람들은 길 양편으로 갈라져 소녀를 향해 수군거렸다.


“귀신이다. 역시 저 아이는 재앙 그 자체였어!”


소녀는 그런 말에 움츠리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리고 조금 더 당당해 보이도록 어깨와 가슴을 활짝 폈다. 가슴이 뻐근했지만 너무도 긴장한 나머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촌장의 집이었다.


“네, 네가 어떻게…?”


소녀를 본 촌장은 대번에 아연실색하며 뒷걸음질 쳤다. 소녀는 한참 동안 품 안에 든 총신을 만지작거렸다. 막상 그것을 꺼내 저 비열한 얼굴을 향해 발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손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촌장은 소녀가 망설이는 듯하자 재빨리 벽에 기대어 있던 낫을 집어 들었다.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고?”


촌장의 행동을 지켜본 소녀는 품에서 총을 꺼내 촌장을 향해 겨누었다. 촌장은 소녀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 그런 건 어디서 난 것이냐?”


손이 달달 떨려왔다. 소녀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줘.


“잘 생각해 보거라. 그걸로 날 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난, 난 재앙이 아니야.”

“물론이지! 네가 재앙이라니! 이렇게 다시 살아 돌아왔는데 어느 누가 재앙이라 하겠느냐?”

“사라진 마을 사람들은… 우리 가족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거야? 정말 사라진 거야?”


소녀는 금방이라도 총을 발사할 기세로 잔뜩 격앙되어 소리쳤다. 촌장은 총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손사래 쳤다.


“아, 알겠다, 알겠어. 다 말할 테니 총은 좀 거두어 다오!”


소녀는 총을 쥔 손을 바투 쥐었다. 그럴수록 촌장의 얼굴은 점점 더 새하얗게 질려갔다.


“다 분타주님이 시켜서 한 거야! 분타주님의 예언대로 모두 사라져버려야 네가 진짜 재앙이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그럼… 모두 어디로 데려간 거야!”

“바다에 던져버렸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낸들 어찌 알겠느냐?”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했다. 살아 돌아올 리 없으리란 걸 어렴풋이 깨닫긴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었다니. 가슴 한 켠이 도려낸 듯 시큰거렸다. 

그때 느닷없이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건 총소리가 아냐, 이건… 

아직 방아쇠를 당기기 전이었다.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마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촌장은 고개를 들어올려 화마에 휩싸인 마을을 보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대문이 벌컥 열리며 청년이 뛰어들어왔다.


“촌장님! 큰일났습니다! 충각단, 충각단이…!”


청년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이내 날카로운 검이 청년의 목을 꿰뚫었다 빠르게 사라졌다. 청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누, 누구냐?”

“아직도 그러고 있었다니,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군.”


대문으로 성큼 들어온 남자. 충각단의 제독이라 불리는 그 사내였다. 남자를 보자 소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촌장은 소녀를 향해 윽박질렀다.


“너냐? 네 짓이었구나! 네가 충각단을 불러들인 게야! 분타주님 말씀대로 역시 넌 재앙을 부르는… 욱!”


남자는 검을 단숨에 촌장의 배에 찔러 넣었다. 촌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쓰러졌다.


“표적이 움직이지 않으니 충분하겠지. 마무리는 네 차지다.”


남자는 검 끝으로 촌장을 가리켰다. 소녀는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다시 한 번 총을 든 손을 들어올렸다. 표적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못 맞힐 정도는 아니었다. 이마저 실패한다면 남자는 크게 실망할 것이다.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호흡 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




총구에 피어 오른 연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남자는 걸음을 돌려 멀어져 갔다. 소녀는 남자를 쫓아갔다. 총을 발사한 충격으로 이제 막 아물기 시작했던 가슴의 상처가 벌어져 조금씩 피가 흘렀다. 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이대로 남자를 놓치면 또 다시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지금, 남자의 존재는 어둠 속 한 줄기 빛이었다.

필사적으로 남자의 망토자락을 붙잡은 소녀는 헉헉대며 남자가 돌아보기만을 기다렸다. 소녀의 기척을 느낀 남자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두 손으로 총을 들어올리며 입을 떼었다.


“이, 이거…”

“뭐지?”

“빌려주셨잖아요. 돌려드릴게요.”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대꾸했다.


“이 총은 네 것이다. 빌려주거나 빌리는 건 빚을 남기는 일이니 애당초 하지 않지.”

“그, 그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착각하나 본데, 난 널 도와주러 온 게 아니다. 이미 이 마을은 사마교로 물들었어. 종말을 원하는 녀석들뿐이지. 그런 녀석들에게 삶은 사치다.”


하지만 소녀에겐 남자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직 한 줄기 빛을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일념만이 소녀를 강하게 붙들어 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다시 걸음을 떼려 하자, 소녀는 용기를 내어 조금 더 큰소리로 외쳤다.


“절 데려가 주세요!”

“이미 여기 내려준 걸 보고도 모르겠나?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어째서죠? 시킨 대로 복수도 했는데…”

“복수를 시켜서 하다니, 복수 하나 스스로 못 하는 녀석이 충각단에 무슨 소용이 있지?”


소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이대로 포기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으리란 것.

소녀는 곁에 있던 날카로운 돌을 주워들었다. 돌을 든 손을 눈까지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언젠가, 이 눈을 없애고 재앙을 면할 수만 있다면 뽑는 일도 불사하겠다고 각오하지 않았던가. 연거푸 찾아오는 불행은 재앙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젠 지긋지긋한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리라. 

소녀는 날카로운 부분으로 오른쪽 눈을 그어버렸다.

 



자신의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른다. 남자를 만난 후부터 소녀 안에 잠들어 있던 용기가 깨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이마에서부터 눈 아래까지 피가 철철 흘러 소녀의 얼굴 반을 뒤덮었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제… 제 의지입니다. 부디 거둬주세요…… .”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녀는 남자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 남자는 소녀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마음은 알겠다만 넌 아직 너무 어리다. 만약 네가, 내가 있는 곳까지 올라올 수 있다면 그땐 너를 받아주도록 하지.”


소녀는 눈물을 삼켰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부족하단 말인가.

소녀의 손에서 돌이 힘없이 떨어졌다. 걸음을 돌리려던 남자는 우뚝 멈춰서더니 다시 소녀에게로 돌아와 덧붙였다.


“그래도 용기가 가상하니 네게 배 한 척을 선물로 주마. 이걸로 내가 있는 곳까지 따라잡아 봐라.”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눈동자 속에서 불길이 고요히 일었다.




***




작은 해안 마을에 새로운 수배령이 나붙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게시판의 수배령은 오랫동안 충각단의 차지였다. 새로운 악인의 등장은 조용한 해안 마을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적안마녀?”


가슴에 커다란 십자흉터가 있는 붉은 눈동자의 여인. 여인은 해안 마을들을 급습해 약탈하며 세력을 불렸다. 여자라고 깔보던 남자들은 어느덧 그녀의 발 아래 납작 엎드려 충성을 맹세한다고. 

깔끔한 사격 솜씨로 상대를 일격에 해치운다는 무용담은 충각단까지 전해졌다. 제독은 단원이 가져온 수배령을 들여다보았다.


“설마… … .”


제독은 수배령을 바람에 실어 날려보냈다.


“제독님! 웬 함선이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제독은 단원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희끗해진 머리가 바람에 날려 헝클어졌다.

단원은 제독의 명령을 기다렸다. 제독은 느릿느릿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외쳤다.


“포를 준비하라!”


제독의 명령이 떨어지자 단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포탄을 날랐다.

함선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왔다. 이윽고 함선이 지척에 이르자 단원들은 초조한 듯,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제독을 올려다보았다. 제독은 함선 위로 나부끼는 붉은색 깃발을 보았다.


“대기하라.”


함선이 멈췄다.

잠시 후 갑판 위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질끈 동여맨 붉은 머리, 가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가슴 한복판을 가로지른 십자 모양의 흉터.

여자는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제독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제독은 미동도 않은 채 눈앞에 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둘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후 여자는 품에서 총을 꺼내 제독에게 건넸다.


“당신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습니다. 이젠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시겠지요.”


제독은 총을 받아 들었다. 여기저기 난 흠집들이 그간 여자가 얼마나 많은 전장을 헤쳐왔는지 설명해주는 듯했다. 총을 살펴보던 제독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제야 같은 배를 탈 자격이 생긴 것 같군.”


제독은 자신의 품에서 총 한 자루를 더 꺼냈다.


“이 총은 맹약의 증표다.”


여자는 총을 받아 각각 허리춤에 꽂았다. 가슴 가득 감동이 벅차 오른 듯 여자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총 하나에 버거워 했던 그 옛날 붉은 눈의 어린 소녀는 이제 없었다. 


“평생을 제독께 충성하겠습니다.”


여자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독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거대한 제독함대 위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붉은 기가 함성에 화답하듯 힘차게 펄럭였다.


-끝




  • 1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운요 [악녀 심청이] 잘읽었슴댜! :) 어떤 노력으로 적안마녀가됬을지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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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젤 [화이트 젤리아] 여름방학쯤 되면 격사가 나오겠죠? 비무전 마지막에 행사로다가 나오겠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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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니메르시 [가니메데스네] 네게 이 모자를 맡기마 훌륭한 해적이 되어 나에게 돌려주러 와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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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꿀라떼 [꿀꿀라떼] 진짜 힘들고 괴로울 때 아버지같은 사람을 만난 거구나. 근데 남해함대 애들은 찌질이 악당들인데 제독 아저씬 멋있는 듯... 대장 빨인가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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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현 [민폐요정] ...대사막 환영초밭은 오토가 더많은거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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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ystory [또오레스] 아항 동진아눈에 상처가 저 이유였네.. 마지막에 다시 만났을때 흐믓해지네요 ㅋㅋ
    읽고 나니깐 무법자의 섬을 한번 돌아 보고 싶어졌어...해봐야 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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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키엔 [기사단 로토리] 무법자의 섬에서 우리를 즉사시키는게 저 총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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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정 [절정] 동진아 가슴에 상처 어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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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eRyu [제류] 웹툰! 웹툰도 그려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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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짐승 [물마로] 크...어릴때부터가 아니라 커서 합류한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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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틱틱앙 [깐돌쭈] 그래서 동진아 총이 2개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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